나를 잊지 말아요 잊고 싶은 기억이 있더라도 나를 잊진 말아요

 

나를 잊지 말아요잊고 싶은 기억이 있더라도 <나를 잊진 말아요>

 

멜로물은 즐기는 편이 아닌데다 [나를 잊지 말아요]라는 지극히 고전적인 제목 때문에 크게 끌리지 않은 영화였다. 그래서 개봉했을 때도 그렇고 그 후로도 선뜻 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었는데, 지난 토요일 봄비도 추적추적 내리겠다, 모처럼 집에서 온종일을 늘어지게 쉬면서 감성 도는 정통멜로물임을 강조하는 이윤정 감독의 [나를 잊지 말아요]를 보았다. 안 보고 그냥 지나가기에는 아무래도 투톱주연 정우성과 김하늘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도 한몫했다.(ㅎㅎ) 정우성 한 사람만으로도, 또 김하늘 한 사람만으로도 봐줘야 하는 게 싶었던 것이다. 게다가 정통멜로에 미스터리 요소가 가미되었다는 점도 놓칠 수 없다는 흥미를 둗구었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동안에 내내 드는 생각은, 오늘이 토요일이 아니었다면, 그리고 하루 내내 비가 내려서 딱히 다른 할 일이 있지 않았더라면 계속 보고 있기는 힘들었겠다는 것이었다. 지루할 만큼 흐름이 느린데다 과거와 현재를 마구 넘나들며 펼쳐지는 스토리가 어수선하고 모호해서 마치 까마득히 먼 곳에서 희미하게 비치는 한 줄기 빛에 의지한 채 컴컴한 터널 속을 나아가는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순히 지루한 영화라고 치부하기에는 짙은 여운이 오래도록 이어지고 있으니 묘하고 신기하다. 마치 씹으면 씹을수록 더욱 깊은 맛이 나는 바게뜨처럼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이 영화가 주고자 했던 메시지가 더욱 가슴깊이 와닿는 묘미가 느껴지는 것이다. 그래서 고은 시인의 “올라갈 때 못 본 꽃 내려올 때 보았네”라는 짧은 시에서 연상되듯, 영화를 보는 동안에는 미처 캐치하지 못했던 의미를 영화가 끝난 후에 하나하나 끄집어내 머릿속에서 다시보기를 하고 있는 참이다.

 

영화의 오프닝은 석원 역을 맡은 정우성이 지친 듯 초췌하고 꺼칠한 모습으로 등장해 공허할 만큼 담담한 목소리로 “실종신고를 하려고 하는데요”라고 말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화면이 밝아지자 그곳은 경찰서다. 경찰이 실종자 성별, 나이, 실종 당시 인상착의 말씀해 달라고 하자 석원은 머리를 돌려 뒤편 벽에 걸린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며 “키는 180이 넘는 것 같고, 머리는 좀 긴 편인 것 같고요”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신고인은 실종자와 어떤 관계세요”라는 경찰의 질문에 “본인이에요. 제 실종신고를 하고 싶습니다”라는 다소 충격적인 대답을 한다. 나를 잃어버려서 스스로 자신의 실종신고를 하러 온 석원의 사연이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렇게 교통사고 후 10년간의 기억을 잃어버린 채 깨어난 석원 앞에 진영(김하늘)이 나타나 석원을 보며 눈물을 흘린다. 석원은 “처음 본 여자가 날 보고 울었다”고 하지만, 사실 진영은 처음 보는 여자가 아니라 석원과 결혼해서 지난 10년간 함께 살아온 아내다. 서로 사랑해서 결혼한 후 행복한 삶을 살던 두 사람이었지만 세월이 흐르는 사이에 삶의 무게에 짓눌린 채 이혼 위기에 이르러 있었고, 그 끝에 교통사고로 인해 아이는 죽고 석원은 10년 기억을 통째로 잃은 모습으로 살아난 것이다. 뒤늦게나마 석원과의 사랑을 지켜야겠다고 마음먹은 진영은 우연을 가장해서 석원 앞에 나타나 다시 그와 함께하면서 사랑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찾아나선다는 스토리다.

 

그런데 멜로라고 하기엔 그 농도가 너무 약하고 미스터리라고 하기엔 그 치밀함이 너무 허술해서 아쉽다. 차라리 정통멜로를 내세우기보다 미스터리 요소를 좀더 가미했으면 더 좋았을 뻔했겠다는 생각도 든다. 정우성이 지극히 절제된 모습으로 인생의 10년을 잃어버린 뻥 뚫린 삶을 살아가고 있는 허무한 남자의 느낌을 잘 살려주고 있는 데 비해 통통 튀는 매력의 발랄한 모습을 연기한 김하늘은 좀 어둡고 과거와 현재를 어수선하게 오가는 스토리 탓인지 자꾸 맥이 끊어져 버리는 바람에 그 매력이 마음껏 발휘되지 못한 것도 아쉬운 부분이다.

 

 

극중에서 남편을 살해했다는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 김영희 역을 맡은 장영남이다. 영화를 보는 동안에는 왜 이 여자가 장면장면마다 등장해서 석원과 진영이 민들어나가는 스토리의 흐름을 자꾸 깨뜨리는지 의아했는데, 사실은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가장 큰 메시지의 열쇠는 바로 이 여자가 쥐고 있다. 석원이 왜 기억을 잃은 상태로 깨어나야 했는지, 어쩌면 스스로 기억을 잃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생각해 보게 만드는 단서를 주는 것이 바로 이 여김영희이기 때문이다. 아내에게 살해된 줄로만 알고 있던 김영희의 남편은 알고 보니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잘 살고 있었던 것이다.

 

이따금 해외나 국내에서 죽은 줄 알았던 사람이 알고 보니 다른 곳에서 여유자적하게 살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는 기사를 접하곤 한다. 어떤 이유로든 이곳에서의 삶이 견딜 수 없을 만큼 싫어 그때까지의 삶을 가장된 죽음으로 통째로 파묻어버리고 다른 곳에서의 새로운 삶을 택하는 경우인데, 김영희의 남편 또한 자발적인 의지로 종전의 삶을 버리고 다른 삶을 선택한 사람 중 하나였던 셈이다. 이 남편의 선택은 석원의 기억상실 또한 어쩌면 자발적 의지에 의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만든다. 물론 석원 자신도 깨닫지 못하는 무의식에서 이루어진 일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그 때문인지 김영희는 석원을 향해 몇 번이고 “제발 기억을 되찾고 원래 상태대로 돌아오라”고 말한다. 마치 석원이 마음만 먹으면 잃어버린 10년의 기억을 금세 원래대로 되돌려놓을 수 있다는 듯이.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신에게 불리한 기억은 지워버리고 유리한 기억만 오랫동안 품으려 한다. 이러한 망각은 과거의 아픈 기억을 지우고 새로운 희망을 꿈꿀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좋은 면도 있지만, 그 때문에 때로는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할 일까지 모두 잊어버린다면 이 또한 참으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기억을 모두 완전히 잊어버리고 것도 아니고 자신이 잊고 싶은 10년만 잊어버리다니, 일종의 선택적 기억상실인 셈인데, 이것은 의학적으로는 가능한 일이 아니라고 한다. 그저 잊고 싶은 일은 더 이상 기억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의 염원을 담은 희망사항일 뿐이라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현실적으로는 아무리 잊고 싶은 기억이 있다 해도 마음대로 잊을 수가 없어 고통의 바다를 허위적대며 살아가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이다.

 

우리 삶은 <절대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들과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은 일>들이라는 날실과 씨실이 촘촘히 짜여져 만들어지는 한폭의 천과도 같다. 그렇기에 힘겨웠던 일들은 떠올리고 싶지 않다고 해서 그 기억을 지워버리면 그 기억과 함께했던 행복한 순간마저 놓칠 수밖에 없다. 즉 석원이 아내와 함께하는 동안에 괴롭고 고통스러웠던 10년의 기억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리면, 아내와 이렇게 나란히 앉아 잔잔한 행복을 나누던 순간들마저도 떠나보내야 하는 슬픔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어둠이 있어야 빛을 알 수 있고 불행이 있어야 행복을 알 수 있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

 

 

[바닷마을 다이어리]를 연출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자신의 에세이집에서 인간이 인간이기 위해서는 실패까지도 기억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이 결국 성숙한 삶을 사는 데 밑거름이 된다. 그 시간을 기다리지 않고 망각을 강요하는 것은 인간에게 동물이 되라는 것과 마찬가지다”라고 말한 바 있는데, 아내와 함께한 10년을 그 세월을 통째로 날려버린 것이 얼마나 무모하고 무지한 일인지에 대한 석원의 깨달음도 결국은 이 고레에다 감독의 말과 일맥상통한다.

 

그리하여 오프닝에서 자신을 찾아달라는 실종신고를 냈던 석원은 엔딩에서 다시 경찰서를 찾아가 잊고 싶어서 기억 속에서 지워버렸던 진영, 즉 아내를 찾아달라는 실종신고를 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를 잊지 말아요>라는 말을 다시 내뱉는데, 이제 이 말은 석원 자신을 잊지 말아달라는 호소라기보다는 “아무리 기억하기 싫을 만큼 힘겨운 삶일망정 함께하면서 행복했던 기억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누구든 <나 자신을 잊고 사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는 관객을 향한 진정어린 충고처럼 여겨진다.

 

이상, 나를 잊지 말아요 잊고 싶은 기억이 있더라도 <나를 잊진 말아요>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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